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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디53

<제83호> 오래 된 일기_잔디(允)  사무실에서 삼월 안에 건강진단서를 제출하라기에 급히 보건소에 갔다. 등으로 받는 햇살이 좋은 날, 간단히 정말 간단히 검사받고는 보건소 마당 의자에 앉아, 봄 햇살을 받다가 나는, 보았다. 매실나무 가지에 피어난 연분홍빛 매화. 우리 집 마당가엔 아직, 하얀 꽃봉오리인데... 아, 피어났고나, 그대여...  숨이 더 깊고 고요한 숨을 맞이한다니, 나도 덩달아 나의 지나간 시간을 읽는다. 드문드문 썼던 일기. 숨에 원고를 보내기 위해, 아니 숨을 쉬기 위해 썼던 원고. 원고를 쓰려고 썼던 낙서 같은 기록. 그 기록들 중에 아직 수첩에 숨어있는 문장들. 단어들... 2013이란 숫자와 나란히 놓여 있는 글씨들... 그때의 상념과 별반 다르지 않은 오늘을 살고 있는 마음들. 아기 키우느라 허둥거리면서도 .. 2019. 10. 23.
<제82호> 보통의 겨울 달밤_잔디(允)  아침. 잠을 충분히 잘 잔 유쾌한 목소리로 아이가 묻는다. 아이 - “엄마, 분무기로 물 뿌려 줄까?” 나 - “...... 아니.(퉁명스런)(자다가 봉창 두드리나...)” 아이 - “(여전히 유쾌한 목소리로) 엄마는 꽃처럼 예쁘니까...” 나 - “ㅋㅋㅋ” 녀석의 유머가 그의 마음속에서도 웃음으로 피어나기를 바라는 보통의 아침.  스무 살에 혼인하여 그때의 나이보다 더 길게 스무 여섯 해를 한 남자와 오롯이 살아온 여자의 이야기를 듣는다. 아이 둘을 낳고, 그 아이들이 또한 스물이 넘어 자신을 살고 있지만, 그는 여전히, 그 곁을 지킨다. 농사라는 것이 누군가는 자영업이라 쉬고 싶을 때 쉴 수 있는 일이라 여기지만, 그럴 수 없는 일이다. 초록은 밤에도 자라고, 그가 몸이 아플 때에도 자라고, 그.. 2019. 10. 23.
<제81호> 문득_잔디(允) 바람 타는 나무가 더러 운다고 해서 사랑이 흔들리는 것은 아니리. 그 어느 바람에도 뿌리째 흔들리지 않았고 그 어느 눈보라속에도 속까지 젖지는 않았으니 - 안상학. 「나무가 햇살에게」 부분 환한 달밤이 아니더라도, 문득 누군가 그리워지는 밤, 안부를 묻고 싶어, 잘 지내고 계시는지... 그대. 올해도 꽃으로 피어나소서. 짧은 문장을 건네고픈 그런, 사람 누구에게나 마음속에 있지 않을까... 그리고 예기치 않은 순간, 십 년, 혹은 오 년의 지나간 시간을 훌쩍 넘어 그 시간을 살아온 나에 관한 이야기를 가까운 마음으로, 풀어놓게 되는 그런 순간을 맞는다. 서울 하늘 아래, J. 그와 나는 1992년 동아리에서 만났다. ‘동아리는 죽었다’라는 표현이 자주 쓰여지던 그때. 대자보에 동아리를 살리려고 애쓰는 움.. 2019. 10.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