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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지/마음거울93

<제92호> 시를 들려줘서 고마워_박현경(교사) ‘지각시’. 지각하면 외우는 시(詩). 우리 반 교실에서 자주 쓰이는 단어다. 처음 교사가 됐을 때, 반복해서 지각을 하는 학생들에게 자꾸 화가 났다. 그 학생들에게는 지각하는 습관을 안 고치면 나중에 사회생활을 어떻게 하려고 그러느냐, 등교 시간도 하나의 약속인데 약속을 계속 어기면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 된다는 등의 따분한 이야기를 격앙된 어조로 늘어놓곤 했지만, 정말로 그들의 미래가 걱정돼서 화를 낸 건 아니었다. 돌이켜 보면 내 분노의 이유는 두려움이었다. ‘나의 지속적인 지도에도 불구하고 이 친구들이 행동을 바꾸지 않고 계속해서 지각을 한다는 건 내가 무능한 교사라는 증거가 아닐까? 이러다 내 통제를 벗어나는 학생들이 점점 더 늘어나면 어쩌지?’ 지금 생각하면 안쓰럽고 웃음이 나온다. 자기 고유.. 2020. 1. 8.
<제90호> 힘_박현경(교사) 후두둑, 후두두둑. 빗방울을 흩뿌리는 하늘이 야속했다. 우산 없이 집을 나선 아침. 여느 때처럼 등에는 백팩, 어깨엔 도시락 가방을 메고 걷는 출근길. 빗방울은 점점 굵어져 빗줄기로 변했고 나는 꼼짝없이 비를 맞으며 걸었다. 비를 피할 곳도 마땅치 않았거니와, 혹시 그럴 장소가 있다 해도 비가 그치길 기다리다가는 학교에 늦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도착할 즈음이면 머리고 옷이고 양말이고 다 흠뻑 젖어 있을 텐데, 처량한 꼴로 1교시 수업에 들어가게 됐다고 속으로 투덜대며 조금이라도 덜 젖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승용차들이 한 대 두 대 빠르게 나를 스쳐 지나갈 때마다 내 모습이 더 처량하게 느껴졌다. 그러던 중 갑자기 뒤통수 너머에서 들려오는 “화작 쌤!” 하는 소리. (‘화작 쌤’이란 ‘화법과 작문’ .. 2019. 12. 11.
<제89호> 그렇게 그 집과 화해를 했다_박현경(교사) 그 집은 오랫동안 나의 콤플렉스였다. 부모님이 사랑과 정성을 다해 가꾸신 보금자리였고 엄마, 아빠, 언니, 나, 네 식구가 오손도손 일상을 일구는 소중한 터전이었건만, 나는 우리 집이 창피했다. 군산시 문화동, 언제나 바닥에 물기가 흥건한 재래시장 안 골목, 부모님이 운영하시던 조그만 속옷 가게 앞 빈 점포, 그 내부를 살림집으로 개조하고 시멘트 블록으로 2층을 올린 집. 그 집은 볕이 거의 들지 않고 습기가 많아 곰팡이가 잘 생겼고, 그래서 엄마는 하루에도 몇 번씩 방을 닦고 또 닦으셨다. 여름엔 찜통, 겨울엔 냉골이었다. 하지만 우린 그 집에서 하루하루 행복하게 지냈다. 책도 많이 읽고 그림도 그리고 공부도 열심히 했다. 같은 골목에 살던 유릿집 아이, 빵집 아이, 떡집 아이 들이랑 어울려 노는 것도.. 2019. 10.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