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식지/마음거울97 <제86호> 얼마나 먼 길을 달려 우린_박현경(교사) 일요일 아침. 일억 오천만 킬로미터를 달려온 햇살이 우리 방에 쏟아진다. 일주일을 달려온 우리 몸은 햇살에 녹는다. 내 옆에 누운 그대의 잠든 얼굴을 본다. 그 옆에 누운 왕순이의 갸르릉 소리를 듣는다. 우리가 함께 있다는 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이렇게 나란히 아침볕을 쬐기까지 우린 얼마나 먼 길을 달려 서로에게로 왔는가. 그대는 그해 여름 참 많이 달렸다. 저녁부터 새벽까지는 오토바이를 타고 달렸다. 날마다 짧게는 여덟 시간, 길게는 열한 시간 동안 주로 곱창볶음이나 찜닭을 싣고서 원룸촌 골목골목을 달렸다. 야식집 ‘왕십리 순대곱창’에서 일한 지 일 년쯤 돼 가고 있었다. 야식을 주문하는 이들은 대개 혼자 사는 사람들이었고 그대도 일을 마치면 혼자만의 방으로 돌아가곤 했다. 그리고 아침이면 두 다리.. 2019. 10. 24. <제85호> 하복 윗도리에게 사과를_박현경(교사) “어젯밤에 집에 가서 하복을 다시 입어 보았다. 그래, 생각했던 만큼 나쁘지는 않구나, 하고 생각했다. 오히려 하복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마음속으로 하복 윗도리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젠 벌써 오래전이 되어 버린 어느 날 오후에 나랑 같이 먼 길을 걸어가서 그 하복을 사 왔던 엄마에게도 마음속으로 용서를 빌었다.” 2002년 9월, 열아홉 살 박현경이 썼던 이 글을, 2019년 5월, 서른여섯 살 박현경이 다시 읽는다. 옛 일기장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연필 손글씨. 17년 전 고3 교실 어느 쉬는 시간에 이 문장들을 적으며 시큰했던 코허리 느낌도 생생히 떠오른다.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우리 집은 경제적으로 많이 어려웠다. IMF 사태의 여파였다. 교복 값은 큰 부담이었고 그런 우리 가족.. 2019. 10. 24. <제84호> 질문은 날마다 계속돼야 한다_박현경(교사) 초등학교 5학년 때 담임은 귀싸대기를 잘 때렸다. 자습 시간에 잡담을 하거나 숙제를 안 해 오거나 자신의 비위를 거스르는 아이들에게 그는 늘 매서운 체벌을 가했고 교실엔 공포가 감돌았다. 인상적인 점은 ‘질서를 (때려서) 가르쳐야 한다’는 그의 지론에 우리들 대부분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는 것. 그에게 귀싸대기를 맞을 일이 없는 아이들은 대개 착실한 학생들이었으므로, 그의 말을 잘 듣는 것과 좋은 사람이 되는 것 사이의 경계가 꽤 애매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 분위기였기에 그에게서 전권을 위임받은 반장이 친구들을 체벌하는 일도 이뤄질 수 있었을 것이다. 똑똑하고 모범적인 여학생 J를 투표 없이 반장으로 임명한 담임은 교실을 비울 때마다 J의 손에 30cm 자를 들려 줬다. 떠드는 애를 잡아내 .. 2019. 10. 24. 이전 1 ··· 19 20 21 22 23 24 25 ··· 33 다음